2021. 5. 31. 19:27ㆍ나나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
나나의 사탕
사탕이 녹는 동안 더 이상 녹을 수 없는 것과 다 녹아버린 것과 원래부터 녹아있는 것을 떠올린다 다 나열하고 나면 사탕은 사라져 있다 사실 사탕이 사라진 게 아니라 녹아버린 거야 나나는 녹아내릴 수 있으니까 나나의 사탕은 아무도 먹지 않았지
나나는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없을 때마다 사탕보틀을 채웠다 유리 병 속 사탕이 한두 개씩 늘어날수록 하고 싶은 말이 사라진다 사탕으로 가득했던 주머니가 홀쭉해질 때까지. 나나의 잇속을 향해 개미들이 줄을 지어 기어오네. 누군가 잘못 읽은 줄글처럼. 나나가 뱉은 말을 쉽게 오해한다
나나의 사탕이 입 안에서 녹고 있다 입 속에서 목구멍으로, 목구멍에서 더 깊은 구멍으로 분자와 분자 사이가 멀어질 때 입 안은 고요하다. 사탕은 멀어지고 입 안은 허전해진다. 사탕의 응집력은 단순하니까, 병 속 가득했던 사탕은 언제든지 사라질 준비를 하고 있다. 나나가 말이 사라진 건 사탕 때문일 거야. 모든 걸 사탕 때문이라고 해볼까
사탕의 응집력은 사탕이 깨진 후에야 알 수 있으니까. 나나의 말들도 까넣어야 알 수가 있다고 그랬다. 입 안에서 사탕이 녹는 동안, 사탕을 혀로 굴려보는 동안, 내가 사탕을 녹여보는 동안, 사탕을 계속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사탕은 오목하게 파인 구멍 속 눈알 같기도 했지. 그 눈동자 위에는 묻힌 비문이 있고, 나나는 비문만 말할 줄 알아.
녹이려던 사탕이 와그작, 소릴 내며 깨진다. 응집력은 언제까지나 가능성이니까 나는 사탕을 이해할 수 없다.
석류 속 생태계
여자는 아침마다 습관처럼 석류를 먹는다
잘 익은 열매를 반으로 갈라
알알이 박혀있는 석류를 툭툭 떼어내는 손길,
방형구법을 하는 듯 섬세하다
몸의 노화를 걱정할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슬퍼할 시기는 지났다고 생각하지만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같은
유치한 노래를 부르는 얼굴이
앳된 얼굴처럼 붉다
석류들은 서로를 떠받들며 살고 있다
누구하나가 버티지 못하면
와르르 무너지며 전부 터져버리고 만다고
모두가 석류 속에서 사는 것이라고
여자는 쉽게 단정 짓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사소한 감정들을 억누르며 사는 것일까
너무 약한 알맹이는 탱탱함을 참지 못하고
손에서 쉽게 툭 터져버리고 만다
그걸 여자는 사랑이라고 말한다
입 안에서 흐르는 과육에서
꼭 비린 향이 날 것만 같아
석류의 맛을 상상하며
여자는 지난 사랑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예민한 석류의 속을 툭툭 건드리는 손끝은
열매 속의 생태계에겐 위협일지도 모른다
살고 죽는 건 결국 자그마한 사랑인지
무심하게 씨를 뱉는 여자의 입 속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과 씨름했지
귓속으로 흘러들어와 붉게 번지는
사랑했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여자는 여전히 석류를 톡톡 입으로 까넣었다
나나의 사탕 :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성의 경우 더 또박또박하게 더 큰 목소리로 말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언젠가 도움이 될 거라는 말을. 실제로 사회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고 발언권을 얻기가 힘들다는 점에서 착안한 <나나의 사탕>은 나나의 언어를 사탕에 비유해 점점 부서지고 작아지는 서사로 흘러간다.
석류 속 생태계 : 석류 속 생태계는 여성이 살고 있는 현실을 석류의 생김새에 빗대어 서사를 이어나간 작품이다. 혐오의 양상은 아주 오래 전부터 형성 된 것이며, 우리보다 더 일찍부터 차별 받았던 여성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석류의 과즙은 달콤하고 상큼하지만 쉽게 짓무르고 부서진다. 석류에게 가해졌던 압박을 표현하고 싶었다.
세 번째 작품 ▶ 한수빈, 나나 / 생일파티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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