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31. 19:15ㆍ물란체요카
동국대학교 국어국문문예창작학부
RE RE:
닛시 닛시.
우선 당신의 인사가 틀린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물란체요카에서는 밤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인사말이 아침을 뜻하는 닛시로 통일됩니다. 일단 메일 답신은 잘 받았습니다. 솔직히 조금 알손 했습니다. —지구의 말로 놀랍다는 뜻입니다.— 메일에 답신을 준 것도, 작전 참모로 받아달라는 말을 한 것도 모두 당신이 처음이었거든요. 아마 이 말로 질문에 대한 답은 되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우리의 상황을 이해하시나요? 우리도 살기 위해 지구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시나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란체요카는 오는 닛시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다만 당신이 물란체요카 닛시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물란체요카 성형외과에서 물란체요카 성형을 받아야 하고, 현지화를 위한 물란체요카 의식을 거행해야 하죠. 물란체요카는 수평선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구체 행성입니다. 모난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닛시에게도 역시 뼈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닛시 지망생들이 물란체요카 성형외과에서 뼈 제거 수술을 받고, 신체를 유연하게 하는 약물을 주입해 인간 신체의 뚜렷한 윤곽을 전부 없애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인식하는 겁니다. 우리는 다 같은 피부로 이루어져 있고, 같은 수술을 받은 자랑스러운 물란체요카 닛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우리 닛시조차 외형으로 닛시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윤곽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가, 우리 모두 같은 닛시라는 걸 자각하게 하기 위해서거든요. 가끔 닛시와 닛시가 우연히 팔을 부딪히는 것을 볼 때, 저는 그들이 자연스레 융합되어 녹진한 구체가 되어버리는 상상을 하고는 합니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은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일출을 바라보는 숭고한 의식을 치룹니다. 물란체요카에는 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의식은 아침 여섯 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 총 열두 시간 정도 진행되죠. 일출을 바라보면 공화국을 지켜주는 신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데,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을 믿지 않지만 해를 숨길 수 있는 수평선은 믿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루를 좌지우지하는 수평선. 해를 지 좆대로 할 수 있는. 물란체요카 사람들은 해를 정말 두려워 하거든요. 보기만 해도, 불콰한 기운이 올라오는, 불덩이의 공허한 감각이. 언제 물렁한 살을 녹여버릴지 알 수 없어서. 어찌 됐든 해가 아닌 수평선을 믿는다는 것은 무언가 하나라도 믿는다는 증거니까요. 결국 우리는 신을 믿는다는 겁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그런데,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죠?
결론은 그겁니다. 당신의 정보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정보는 항상 모든 싸움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됩니다. 지구의 지도를 그리거나, 전략적 요충지가 될만한 구멍가게. 좋죠. 정말 좋습니다. 그런데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지도는 구글맵, 구멍가게 위치는 거리뷰 보면 바로 나오는 거. 뻔히 알지 않습니까. 우리가 김 당신에게 원하는 정보는 그런 게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예술. 멍청한 선생이 뭣도 모르는 애새끼한테 수행 평가로 파피에 콜레를 시키지만 않았어도. 이 나이 처먹고서 계속 그때 생각이 나지는 않았을 거라는 사실 말입니다. 커다란 원. 사실 콜라주를 붙일 때 가끔은 미술 선생 면상을 동그랗게 오리는 상상을 하며 씨발 한 마디 뱉고 딸을 친다는 사실. 그 분비물을 벽에 붙은 원 한 가운데 뿌리고, 젖은 종이의 질감을 보며 해사하게 웃음 지어 보인다는 디테일한 정황. 어떻게든 서울에서 취직하고 싶은 마음에 컴활 등등 땄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는 사실. 김 당신이 이렇게 된 건 사회 탓인데. 아닌가, 그냥, 내가 쓸모없었던, 탓인가. 젓갈 냄새 나는 사십 만원은, 좆까는 소리 하지 마세요. 이미 부모님은 너에게 아무런 기대도 걸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인서울 대학 진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고등학교 삼학년 동생이 있거든요. 그런데 부모님은 참 어리석습니다. 어차피 걔도 당신과 별반 다를 거 없는 병신인데 말이죠.
마지막으로 물란체요카에 오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면 바로 보이는 다이소 기준 왼쪽으로 백 이십 걸음 걸으세요. 그러면 버스 정류장이 하나 보일 텐데, 13번 버스를 타고 제가 내리라 하면 내리십시오. 여기서부터는 아무도 당신의 위치를 알아서는 안 됩니다. 당신조차도 말이죠. 내리면 바다가 하나 보일 겁니다. 38-31-15.82, 128-26-00.59. 기억하세요. 기억해. 그런데 있잖아요. 기억이요. 그게.
아니, 있잖아. 너 같은 새끼가 들어 올 자격이 있을까. 내가 그렇게 말은 했지만. 아니, 별건 아닌데요. 처음에 했던 얘기 기억나? 물란체요카 공화국의 사람들이 말입니다. 어떻게 살았냐면 말이야. 아침에 닛시 닛시하는 인사를 하고 말이야. 너 같은 병신들이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항상 수평선을 경멸하면서도 그 힘이 두려워서. 수많은 원의 집합점을 보고. 수평선이 감추고 있는 해라고 믿으면서도 말이야. 해의 속이 텅 비어있다고 생각해서. 혹은 쏟아져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해서. 아침마다 그걸 바라보면서 펑펑 울었대. 공허함을 게워낼 수가 없어서 해를 대신해 토사물을 뱉어내는 상상을, 그런 상상을 했다고 합니다. 해를 보면 힘줄이 형체 유지 의지조차 없이 먼저 녹아내리는데. 그래서 날 이렇게 만든 건 세상입니다, 씨발. 때문에 물란체요카 공화국 사람들은 힘줄이 없는 생명체로 진화해온 거랍니다. 머리가 아프고, 수백 통의 이력서는 지구 행성의 일 같이 아득해지고. 브라크나 프레드 토마셀리는. 수평선과 해의 경계선에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지경에 다다른다는 겁니다. 원을 보고. 원 안에 있지 않은데도 원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다는 상상을 하고. 그래서. 나는. 나는. 나는 있잖아요. 그래서 말입니다. 그게. 그래서.
김이 누구야?
노트북, 덮는다.
고개 돌린다. 커다란 원들의 집합. 원 멍하니 바라보다, 고개 돌려 노트북 다시 열었고, 메인 화면 그대로다.
김, 나에게 보내기 누른다.
-----Original Message-----
From: "김"<mulan@naver.com>
To: "김"<kim123@gmail.com>;
Cc:
Sent: 2020. 1. 21. (목) 3:34 (GMT+09:00)
Subject: RE: 물란체요카 공화국에게 보내는 지원서, 김
네 번째 작품 ▶ 남광민, 김의 기록
'물란체요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ART : 임채림 (0) | 2021.05.31 |
|---|---|
| ART : 남광민 (0) | 2021.05.31 |
| 강예은, 물란체요카 (0) | 2021.05.31 |
| 공통 메일 (0) | 2021.05.31 |
| Introduction (0) | 2021.05.31 |